희망봉에서 온 엽서
말라리아의 추억 | |
---|---|
by 땡스아프리카 | Date 2018-08-17 22:06:02 | hit 2,010 |
말라리아는 단위질병 중 가장 많은 죽음을 낳는 병이다.
해마다 2백만명 이상이 사망하며 전세계에 매년 5억명 이상이 감염되고 있다.
지구 온난화는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의 활동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지구 온도가 섭씨 3도 상승할 때마다 말라리아 발병이 약 7천만건씩 늘어난다.
이 추세라면 약 50년 후에는 세계인구의 65%가 말라리아에 노출되게 된다.
매년 12월10일 스웨덴의 스톡홀롬에서 수여되는 노벨상 생리 의학상 수상자가 얼마 전 발표 되었다.
(남아공에는 3명의 노벨 생리 의학상 수상자가 있다).
올해는 아일랜드 출신 캠벨과 일본의 오무라 사토시, 중국의 투유유 세명이 공동으로 수상하게 되었다.
캠벨과 사토시는 '강변 실명증'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실명을 유발하는 회선 사상충의 특효약을 발명했다.
중국의 투유유 여사는 항말라리아 물질을 발견한 공로로 선정 되었다.
그녀는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해 많은 인명을 구했다.
학계에서는 말라리아 사망자를 확 줄일 수 있는 백신을 개발한다면 다음번 노벨상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그런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 도중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맸던 아슬한 추억(!)이 있다.
다음 해 대학 졸업을 앞두고 아프리카로 배낭 여행을 온 민재와 윤성이, 뉴질랜드 출신 스콧.
이들 셋은 4륜 구동차로 남쪽 케이프타운에서 북아프리카 이집트까지 종단하고 싶다고 나를 찾아왔다.
해외 여행이 처음인 민재는 인도에서 몇 달을 잘 버티었다며 자신감까지 보였다.
아무런 준비가 안된 상황이 무모해 보이는 구석도 있었지만 유목민 기질의 스콧이 있어 계획대로 추진 되었다.
셋은 꼬박 11월 한 달을 케이프타운에 머물며 일정과 장비를 챙겼다.
12월 초 이들은 첫 번째 목적지 나미비아 사막으로 떠났다.
나는 연말이라 시간이 여의치 않아 중간 중간 합류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혼자된 나의 마음은 함께 떠나지 못해 안달의 연속이었다.
서리서리 포개어둔 황진이의 마음이 이랬을까?
드디어 이듬해 1월 그들과 다시 함께 할 수 있었다.
광막한 세렝게티 초원을 달리던 야생 동물들의 무리진 이동, 차를 몰아 아무도 없는 벌판의 한 복판에 섰을 땐 하염없이 시간을 멈춰 두고 싶었다.
텐트를 친 초원의 야영장에 밤은 찾아오고 별들은 총총하였다.
그날 밤 우리는 바로 눈 앞에서 태양 같은 만월이 떠오르는 풍경에는 탄식만 쏟아냈다.
평소 '배낭을 매고 떠나는 이는 괜찮다'는 나의 통념은 그리 빗나가지 않았던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적도 가까이 동부 아프리카의 케냐, 탄자니아는 고온다습이었다.
탄자니아 모시에 있는 저렴한 백패커와 초원에서 야영으로 버틴 시간은 체력 소모가 많았다.
하루는 몸에 힘이 쑥 빠져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아무 것도 먹을 수도 없었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뜨거운 게스트 하우스 방에 홀로 누워만 있어야 했다.
민재가 하드 드라이브에 담아온 영화를 보라 주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곳은 천정이 낮아 찜통이었으며 흐물흐물 도는 천정 선풍기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해가 지고 저녁이 가까워지자 쪼개질듯한 두통과 이를 딱딱 부딪칠 정도로 몸이 떨리는 오한은 더욱 심해졌고 복통까지 밀려 왔다.
나는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병원으로 가자 그랬다.
케이프타운에서 가져간 말라리아 약을 복용하고 있었지만 증상이 딱 '말라리아가 아닐까?'싶었다.
택시에 쓰러져 병원 응급실에 들어가니 그 와중에도 눈에 들어온 광경은 어수선하고 부실한 병원 느낌이었다.
그 지역 모시(Moshi)에서 가장 큰 병원이지만 그랬다.
나를 본 의사는 나의 피를 뽑았다.
다음날 아침에서야 나온 피검사 결과는 말라리아였다.
누구나 무얼 기다리는 시간은 늘 힘들지만 태어나서 그날 밤처럼 불안과 초조함으로 기다려 본 적이 없다.
병실이 없어 장터 같은 복도 한편 간이 침대 위에 쓰러져 누워 있었다.
천정을 올려다 보는데 여기 저기 꺼지고 흐린 형광등 불 빛 만큼이나 나의 눈도 점점 흐릿해져 갔고 몸도 물 먹은 솜처럼 스러져 가는 것 같았다.
그 순간에도 똑똑한 민재와 윤성이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누군가 깨워 눈을 떠보니 하얀색 병원 가운의 어깨에 붙은 태극기가 선명히 내 눈에 들어왔다.
민재 윤성이가 수소문해서 한국 사람을 찾아 온 것이다.
내 앞에 나타난 그녀는 아프리카 오지를 돌며 봉사를 하는 이 병원의 약사였다.
그녀는 의사에게 특별히 나를 부탁해 주었고 덕분에 복도에서 병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정도만 바뀌어도 우선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동부 아프리카는 스와힐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여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
그녀는 통역을 도와 주었고 아는 분에게 연락해서 한국식 죽을 써서 김치와 함께 병실로 가져왔다.
아프리카의 병원에서도 한국 사람을 만나다니 코끝이 찡했다.
덕분에 나는 빠르게 호전되었다. 지금도 그녀와 소식 주고 받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것'.
막막한 심정으로
아프리카 이역의 병상에 누워있던 며칠 동안 나는 많은 상상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삶을
그리움을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소중하게 다가온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퇴원 후 그들과 헤어져 혼자 된 난,
퀸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고향 잔지바르 섬으로 향했다.
희망봉에서 김은영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