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봉에서 온 엽서
500년 전 그때, 우리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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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스아프리카 | Date 2018-05-07 16:51:06 | hit 1,841 |
중세의 가을, 유럽인들은 희망봉을 알고 단순히 인도로 가는 길만 찾았을까?
그들은 그것만 알고 물러 날 사람들이 절대 아니다.
희망봉을 통해 인도로 가는 길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을 알았으며, 그를 바탕으로 큰 세계를 꿈꾸게 된다.
우선, 거대한 대륙 아프리카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새로운 관점으로 미지의 아프리카를 바라 보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훗날 아프리카 식민지로 귀결된다.
또 하나, 희망봉을 무사히 돌았으니 지구가 평평하지는 않다는 사실에 다가갔다.
배를 몰아 세상 어디라도 나가고 싶어했다.
'경천동지', 세상이 바뀌는 그 시간,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당시 조선은 많은 재물과 권력을 차지하고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는 ‘훈구파’와,
고려 말 역성혁명에 반대하며 시골로 숨었던 온건파 신진사류의 제사들인 ‘사림파’간의 네 번의 ‘사화’가 지나갔다.
1498년 연산군 때 일어난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
두 번째는 1504년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한 ‘갑자사화’,
세 번째는 1519년 사림파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은 사건 ‘기묘사화’,
네 번째는 명종 때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가 있었다.
약 50여년에 걸친 연산군에서 명종 사이에 있었던 사화는 매번 사림파의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사림파가 완전히 패배한 건 결코 아니었다.
사화에서 살아남은 사림파는 산천을 유랑하며 지방으로 내려가 근거지를 만들어 놓고 때를 기다렸다.
서원을 중심으로 제자를 키우면서 조금씩 세력을 불려 나갔다.
명종이 죽은 후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파는 다시 조정에 등장할 수 있었다.
이후 사림파는 조선의 권력과 정치를 차지하였다.
최후의 승자는 사림파였다.
15세기 초 유럽인들은 희망봉을 알자 좁은 지중해를 떠나 더 넒은 바다로 뛰어 들기 시작하였다.
이제부터는 미지의 지역, 세계 정복이라는 차원에서 바다를 바라 보았다.
1519년~1522년 사이 마젤란의 원정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까지 몸소 확인 하였다.
그 후 대서양 연안의 국가들은 차례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순식간에 세계 무역 지도를 확연히 바꾸어 버렸다.
그 시간, 우리의 조선에서는 사화로 피에 젖은 길이 흐르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바다가 아닌 피바다가 흐르고 있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다시 읽다 찾아 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