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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이 다녀간 케이프타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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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스 아프리카 | Date 2017-11-22 23:52:42 | hit 2,151 |
인류 역사상 오랜 세월에 걸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쳐온 위대한 인물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무게와 영향력이 변치 않는 인물 중 단 셋을 꼽으라면?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내가 누구인지 '정신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해준' 지그문트 프로이트,
유기적 자연의 진화 법칙으로 세계관을 뒤바꾼 '진화론'의 찰스 다윈을 꼽는다.
이들은 인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사건의 장본인들 이기도 하다.
다윈은 1831년 12월, 토끼를 쫓는 사냥개처럼 비글호를 타고 영국 플리머스 항을 떠나 연구 탐사 여행 닺을 올렸다.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에콰도르를 거쳐 태평양을 가로질러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들렀다.
이어서 아프리카의 남쪽 케이프타운을 방문하고 대서양 섬을 탐사 후 브라질을 거쳐 1836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2년을 예상 했던 여행이 5년이나 걸린 것이다
다윈은 이 항해를 통해 훗날 진화론의 기초가 될 동식물과 지질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케이프타운은 다윈 연구 여행의 마지막 기항지 중 하나였다.
1836년5월 31일 비글호는 케이프타운 사이먼스 타운(Simon's Town)에 닻을 내리고 6월18일까지 머물렀다.
다윈도 처음에는 케이프타운은 그리 감동을 주지도 않았으며 이방인에겐 재미없는 곳이라고 느꼈다.
아마도 남반구 6월의 겨울이 춥고 쓸쓸한 감상이 밀려 오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거센 사이먼스 타운의 겨울 해풍은 5년 가까운 긴 항해로 지친 스물 일곱 살의 젊은 학자를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2년 전 먼저 케이프타운에 들어와 남반구의 하늘을 관측 하고 있던 존 허셜(John Hershel) 만나고 다윈은 케이프타운 매력에 빠진다.
19일 간의 케이프타운 연구 여정은 사이먼스 타운(Simon's Town)을 출발하여 서부 지역인 와인버그(Wynberg), 클레어몬트(Claremont), 옵서바토리(Observatory)를 경유한다.
현재의 케이프타운(Cape Town) 시내 중심과 테이블 마운틴(Table Mountain), 라이온즈 헤드(Loins Head), 시 포인트(Sea Point)를 거쳐 후반에는 내륙 안쪽으로 길을 틀어 팔(Paarl), 드라켄스테인 마운틴(Drakenstein Mountain), 포도원 지역인 프랑슈훅(Franschoek)과 케이프 플랫(Cape Flat)을 거쳐 돌아오는 코스였다.
약 180년 전 다윈이 방문 하였던 장소들은 지금은 주요 케이프타운 여행자의 코스가 되어 있다.
다윈이 케이프타운 체류 기간 중 가장 주목한 분야는 지질이었다.
케이프 반도의 암석을 주로 모았으며 곤충, 동식물의 표본들도 채취 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케이프타운 주변의 아름다움과 경제, 사람, 도시계획과 교통 시스템까지도 관심 있게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이는 실용성과 산업 그리고 제국이라는 가치에 몰두해 있는 영국적인 태도가 아닌가 추측 해 본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이런 자료를 토대로 제국을 창설해 나갔기 때문이다.
과학주의에는 오남용이 뒤따른다.
진화론도 윤리적 정치적으로 잘못 사용하면 부작용을 내포한 이론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람 잡는 우생학 역시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비과학적인 우생학을 도용하여 극도의 악행을 저질렀다.
사회 분야로 다윈의 이론을 확대 적용한 사회적 다위니즘(Social Darwinism)은 제국주의의 이론적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이는 인종차별과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적 우월의식을 갖게 하였다.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 과학적 현상을 설명한 것이지 인류의 지향점은 아니었다.
다윈이 다녀간 남아공은 지구상에서 가장 악랄하고 체계적으로 인종차별 (아파르트헤이트)이 행해졌던 땅이었다.
다윈이 살아 있다면 그는 차별의 땅이었던 남아공의 인종분리 역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망자는 말이 없다.
케이프타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