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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인종분리 정책(아파르트헤이트) 질문 4가지 (1 of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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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스아프리카 | Date 2017-02-13 21:37:13 | hit 2,925 |
조카 민수가 케이프타운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우리 집에 왔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엄마랑 헤어지던 날 밥상 머리에서 엉엉 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대학생이 되고 지금 군대에 가 있다.
석 달 전 휴가를 받아 케이프타운을 찾아와 주어 반가웠다.
군대에 있으면서 읽고 싶었던 책을 만나고, 특히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변화는 나를 기쁘게 했다.
얼마 전, 남아공 관련 책을 읽다 '남아공의 인종분리 정책(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이 메일로 물어왔다.
그 질문과 답을 올린다.
Q : 민수의 질문 1
아파르헤이트 백인 정권은 아프리칸스어(남아공에 들어온 네덜란드인들이 만든 지배자 언어)를 사용하는 보어인(남아공에 들어온 네덜란드 농부들)들이 설립한 정부로 알고 있는데요, 보어들은 영국인들한테 강제 이주 당하고 보어전쟁(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1994년까지 남아공은 영국령이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영국이 쫓아 낸 보어인들은 어떻게 자유롭게 아파르헤이트 정부를 세우고 주권을 잡을 수 있었는지요?
A : 답변 1
보어 전쟁은 1902년 종전 되었다.
당시 남아공은 4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영국이 지배하던 케이프 주 & 나탈 주, 보어인이 세웠던 트란스발 & 오렌지 주가 그것이다.
1910년 영국 식민지와 아프리카너 공화국들은 남아 연방이 되었으며 아프리카너인 루이스 보타(Louise Botha)가 이끄는 남아프리카당(South African Party)이 여당이 되었다.
즉, 보어인의 수가 더 많았기에 보어인 출신 보타가 초대 수상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이다.
보타는 영어를 사용하는 백인들과 부유한 아프리카너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폈다.
이후 보어인들은 수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정권을 계속 장악할 수 있었다.
1930년대 후반~1940년대 중 후반의 집권 통일당은 인종 차별정책을 완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부 백인들은 두려움을 느껴 인종주의가 고수 되길 바랬다.
이에 맞춰 야당이었던 국민당은 노골적으로 인종분리 공약을 내세웠다.
그 여세를 몰아 1948년 말란(D.F Malan)이 이끌던 국민당이 여당이 되었다.
말란은 보어인 출신이 아니다.
17세기에 종교 박해를 피해 남아공으로 이주한 프랑스 위그노의 후손이었다.
국민당의 승리는 일당 독재와 인종차별 정책 서막을 의미했으며 남아공 현대사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결국 인종분리 정책은 영국계와 보어계의 백인들이 상호 결탁하고 바라던 합작품이었다.
Q : 민수의 질문 2
세실 존 로즈(Cecil John Rhodes)는 기념비도 있고, UCT(University of Cape Town : 케이프타운 대학교)에는 동상까지, 나름 남아공에서 추모를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영국인인 로즈가 어떻게 보어들의 아파르헤이트 정권에서 그렇게 추모를 받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궁금합니다.
A : 답변 2
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다.
아프리카를 넘어 세계 경영까지 꿈꾸었던 Cecil John Rhodes는 영국의 관점에서는 매우 뛰어난 영웅이다.
그는 다이아몬드를 놓고 보어 전쟁을 일으켰다.
보어 전쟁에서 승리는 영국이 남아프리카는 물론 남부 아프리카 지역을 통치 할 수 있게 해준 밑 걸음이 되었다.
남아공을 거머 쥔 영국은 그 부를 기반으로 그들만의 세상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억눌림을 당한 원주민들이 입장에서 보면 그는 더 없는 악행을 저지른 인물에 불과하다.
로즈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독점, 통합하기 위해 원주민들에게 온갖 방법으로 회유, 협박,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므로 ‘남아공에서 추앙을 받았다’는 의견은 맞지가 않은 것이다.
남아공 국민의 대 다수인 아프리카인(원주민)들은 그를 침략자, 정복자로 생각할 것이다.
옥스포드 대학의 로즈 장학금은 그의 재산을 토대로 출발하였다.
미국의 빌 클린턴도 로즈 장학금 수혜자였다.
이런 사후 자선 사업은 평생 그의 오명을 씻기 위함이 아닐까?
석유 재벌 록펠러가 그의 재단을 만들어서 가문의 위상을 높였듯이 말이다.
이는 미국의 골드 러시와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풍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포개지는 사실이다.
하지만 케이프타운 대학에 오랜 시간 서 있었던 그의 동상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 여파는 영국으로, 멀게는 미국 건국의 할아버지라는 콜럼버스에게 까지 퍼졌다.
관련으로 나의 블로그에 올렸던 지난 글 둘.
http://blog.naver.com/dylanboy/220349149181
http://blog.naver.com/dylanboy/220411365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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