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형을 만나러 처음으로 상경했다.

시골 촌 놈이 맛본 서울의 그 흥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쭉쭉 올라간 고층 건물, 고가도로와 육교, 이쁜 안내양 누나가 있는 시내 버스, 상냥한 서울 말씨, FM 음악 방송. 

내 고향에는 모두 없던 신기한 것 들이었다.

서울 도착 며칠 만에 시내에 나갔다가 명동 입구에 서있는 한국은행을 보게 되었다. 

작은 도시에 살았던 여수 우리 동네의 멋진 건축물 제일은행과 산업은행도 그와 유사한 건축 양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향의 은행 입구에는 돌 계단이 있었고 주변은 아무나 출입하지 못하게 성인 엄지 손가락 굵기만 한 쇠사슬로 돌 기둥 사이를 막아 두었다. 건물이 크지는 않았지만 어마어마하게 높았던 천정은 소년에겐 거대함 이었다. 

뒤쪽 담장은 2미터가 넘는 붉은색 벽돌을 쌓고 폭은 20센티 쯤 되었다. 

나는 친구들과 그 길고도 좁은 폭의 담장 위에 올라가 뛰어 놀다 은행 수위에게 잡혀 얻어 맞곤 하였다. 

그러다 어른이 되어 유럽 여행을 하고 그 건물은 어디선가 본 낯 익은 건축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케이프타운에 살며 타운의 건축물들을 유심히 보다가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거상(巨商)들의 집인 팔라초(Pallazo)였다는 것도 알았다. 

번화하고 성한 도시와 함께 탄생한 팔라초는 3~4층의 석조 건물로 1층은 사무실이나 서비스 가게, 2층은 물건 보관 창고, 3~4층은 가족의 주거 공간으로 쓰였다. 

거상들의 건물이었던 팔라초가 영국으로 넘어와서는 팔레스(Palace), 프랑스에선 팔레(Palais)인 왕의 궁전이 되었다.

14세기 ~15세기에 지중해 무역으로 부(富)를 축적한 이들은 이탈리아 상인들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로미오와 줄리엣》《베니스의 상인》에서 이들의 모습은 잘 묘사되어 있다. 

영국인 셰익스피어의 당시 희곡 무대가 이탈리아였다는 것은 이탈리아의 번성함을 잘 대변한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상인 "안토니오는 지중해로 나간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나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약속한 기일 내에 돌아 오지 못할 경우, 자신의 심장을 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인들은 이렇게 대부업에 몰두한 것이다. 

그 후 사회 체제의 변화로 근대적 개념의 은행이 생겨나면서 은행 빌딩으로 팔라초를 본떠 지었다. 

팔라초는 화재 위험에 대비하여 석재를 사용하고 창문은 작게 만들었다. 

돈을 맡기는 고객이 화재나 도난 위험으로부터 안심을 줄 수 있는 건물로 팔라초는 제격이었다. 

그래서 18세기 유럽의 모든 은행들은 팔라초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 당시 남아공을 점령하고 있던 유럽인들도 이 건축 양식인 팔라초를 본떠 은행 건물을 지었다. 

케이프타운 시내에도 팔라초 양식의 건축물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팔라초는 스탠다드 뱅크(Standard Bank) 건물이다. 

입구에는 기둥을 세웠고 내부는 호화스럽게 치장하였다. 

정형화된 창문과 출입구, 외벽은 석조의 재질감이 살아 있다. 

최초 2층 건물이었으나 두 개층을 더 올려 현재는 4층 구조다. 

길 건너에는 스탠다드 뱅크 건물에 경쟁이라도 하듯 FNB (First National Bank)가 있다. 

이 은행의 중앙에 들어서면 바로 만나는 그랜드 뱅크홀은 사람을 압도할 만큼 웅장하다. 

지금은 공연장과 도서관으로 이용하는 시티 홀 (City Hall)과 과거 중앙은행(Reserve Bank) 이었던 타지 호텔(TAJ Hotel) 역시 대표적인 팔라초 건축 양식이다.

1860년대 중반 남아공의 다이아몬드와 골드 필드에서는 상상을 초월한 막대한 부가 쏟아져 나왔다. 

더불어 월드 클래스급의 금융업이 발달하였으며 은행이나 보험사 건물들이 들어선 것이다. 

현존하는 이 은행 건물들은 다이아몬드와 황금의 물결로 오래 전 부(富)를 경험한 남아공 황금기의 역사이기도 하다. 

케이프타운에서